본문 바로가기

개인적 사심으로

요즘 무슨 재미로 사세요?

반응형

결혼을 앞둔 젊은 커플에게 물어봤다.

"최근에 가장 재미있었던 일이 뭐였죠?, 둘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뭔가요?"

 

한참을 생각한 뒤에 

"둘이 드라이브했을 때가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결혼을 앞둔 연인이라면, 뭐를 해도 둘이 같이한다면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걸어도 좋을 것이고, 간단한 일상의 일을 같이 해도 즐거울 것이다. 

 

돈을 주고 산, 소비적인 행동만 아니라면 좋을 것이라고 예단하면서 질문을 한 것이었다. 

정말로 둘의 마음이 맞고,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면 일상의 어떤 일도 즐거울 것이다. 

다만, 돈을 지불하면서 얻는 즐거움은 그 누구라도 즐거울 수 있다. 그건 마음이 맞는 연인이 아니어도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맛있는 밥이나 후식 또는 아이스크림이나 커피 등 맛집에서 먹는 것은 원수와 함께해도 즐거울 수 있다. 

 


 

소설가 한강에게 요즘 무슨 재미로 사시나요? 이렇게 물었는데 대답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뭐 그리 특별한 것도 없지만, 소소한 즐거움이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가까운 사람들과 웃으며 농담하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소설가 한강은 일상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그는 "저는 술을 못 마신다. 최근에는 건강을 생각해 커피를 비롯한 모든 카페인도 끊었다. 좋아하던 여행도 이제는 거의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저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신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소설가 한강은 "아무리 읽어도 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는 좋은 책들을 놓치지 않고 읽으려 시도하지만, 읽은 책들만큼이나 아직 못 읽은 책들이 함께 꽂혀 있는 저의 책장도 좋아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다정한 친구들과 웃음과 농담을 나누는 하루하루를 좋아한다"라고 덧붙여 모두의 가슴을 울렸다. 

출처 : 허프포스트코리아(https://www.huffingtonpost.kr)

 

 

소설가 한강의 사진, 한강이 끊었다는 술과 커피

 

맛있는 음식과 술, 커피는 우리에게 지속적인 위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소박한 행복은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없다. 흥분되는 일도 아니다. 

매일매일 지속하면서도 모두가 가볍게 즐거움을 나누는 시간이다. 

나를 돌아보고,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사는 것을 물고문에 빗댄 교수도 있고, 석가모니는 흰쥐와 검은 쥐가 밧줄을 갉아먹는 것에 비유했다.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물고문이 있었는데,

두손을 뒤로 묶인 채 물을 채운 욕조 앞에 꿇고 앉아 있으면 취조하는 수사관이 뒷머리채를 잡고 욕조 속에 밀어 넣는다.

월, 화, 수, 목, 금까지 오면 물고문받는 사람은 거의 죽음 직전이 된다. 

이때, 수사관은 잡은 머리를 욕조 밖으로 꺼낸다. 

그러면 물고문당하는 사람은 아~ 거의 죽을 뻔했네라고 하면서 숨을 헐떡거린다. 아! 좋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다시(토요일 일요일이 지나면) 머리를 욕조물에 처박아 넣는다.

그리고 다시 월, 화, 수, 목, 금이 지나면 물 밖으로 나와 숨을 헐떡이면서 생각한다. 아 이제 살만하네. 이게 행복인가?

 

아니다. 그건 행복이 아니다. 

고통이 없는 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처님이 보기에 인간 중생들의 삶이란?

광야에서 야수에게 쫓기다가 어떤 우물 안으로 숨어들려고 하는데 

그 우물 안쪽으로 밧줄 하나가 드리워져 있다. 

그 밧줄을 잡고 야수를 피해 우물 안으로 들어가니, 저 우물가 위에서 벌꿀집이 있는데 꿀이 한 방울 떨어진다.

그 순간,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내가 부여잡고 있는 밧줄을 번갈아가면서 갉아먹는다. 

그 위태로운 순간이지만, 우물 위에서 꿀 한 방울이 떨어질 때 받아먹는 꿀맛에 잠시 행복해하며 사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여기서 흰 쥐과 검은 쥐는 밤과 낮이라는 시간이다. 꿀 한 방울은 한 달에 한번 받아 소비하는 월급이다. 

중생들은 그렇게 위기 속에서도 한 방울의 꿀맛에 취해 위기에 처해있음도 잊은 채 살아간다. 

 

 

이야기의 원본을 찾아보니, 앞에서 설명한 것과 조금 다르네요. 

워낙 20~30년 전에 읽었던 내용이라 내 머리속에서 각색된 것 같습니다. 

 

은해사 극락보전 흰쥐와 검은쥐 이야기

 


한 나그네가 아득히 펼쳐진 넓은 벌판을 걷다가 갑자기 사방에서 사납게 일어나는 불길을 만났다.

나그네는 불길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 성난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서 나그네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코끼리를 피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달리다 절벽 앞에 다다른 나그네는 더 이상 갈곳이 없음을 알았다.

이때 천우신조로 우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마침 등나무 넝쿨이 그 우물 안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우물 속으로 내려가려는데 우물 바닥에는 커다란 구렁이 세 마리가 입을 벌리고 나그네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란 나그네가 다시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올라가려고 위를 올려다보니 위에는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그네는 내려갈 수도 없고 다시 올라갈 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더욱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있는 팔의 힘이 점점 빠져 기력을 다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설상가상 등나무 넝쿨을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면서 갉아 먹고 있었다.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포기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진한 액체가 얼굴에 떨어졌다.

혀로 핥아 먹어보니 꿀이었다.

등나무 줄기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허기도 지고 몹시 갈증도 났던 이 나그네는 달콤한 꿀맛에 빠져 방금까지 두려워했던 상황은 까맣게 잊어버린 체 떨어지는 꿀 한 방울을 받아먹으려고 온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었다.

사바세계의 어리석은 중생

위 이야기는 불교경전인 불설비유경에 나오는 설화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꿀맛이라는 쾌락에 빠져드는 인간의 어리석은 삶을 비유하고 있다.

들판에 사납게 번지는 불길은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의 불길(欲火)을 뜻한다.

또한 화난 코끼리는 언제라도 부지불식 간에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로 무상(無常)한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우물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착각하고 의지하는 세속의 권력과 부, 인간관계 등을 뜻하며 등나무 넝쿨은 그런 관계 속에서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목숨줄이다.

그러나 이 목숨을 밤과 낮을 뜻하는 두 마리의 흰 쥐와 검은 쥐가 잠시도 쉬지 않고 하루하루를 갉아먹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세 마리의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우물의 밑바닥은 황천으로 세 마리 구렁이의 의미는 탐진치(貪瞋癡: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三毒)을 뜻한다.

혀를 날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는 우리의 몸을 이루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四大)를 뜻하며 다섯 방울의 꿀은 감각적 쾌락인 오욕락(재물욕 명예욕 색욕 식욕 수면욕)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경전의 가르침은, 인간이 탐진치(貪瞋癡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3독(毒)에 빠져 무상을 깨닫지 못한 체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오욕락의 꿀방울이라는 달콤한 쾌락에 빠져 목숨을 매는 안타까운 현실을 비유하고 있다.

출처 : 영광신문(http://www.ygnews.co.kr)

 

 

단양 구인사 설법보전 외벽에 있는 '안수정등' 벽화. 출처 : 금강신문(https://www.ggbn.co.kr)

불교에서 인생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안수정등(岸樹井騰)’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무서운 코끼리가 나타나 쫓아옵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속에는 나무넝쿨이 늘어져 있었고, 그 사람은 넝쿨을 잡고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밑을 보니 사나운 용이 입을 벌리고 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레에는 네 마리의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는 코끼리가 지키고 있으니 나갈 수도 없고 오직 나무넝쿨만 움켜쥐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나무넝쿨을 갉아대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위에서 꿀이 떨어져 입술에 닿자 그는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맙니다.

여기서 광야를 가는 사람은 중생의 모습이고, 고독한 모습이지요. 광야는 중생이 윤회하는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육도를 뜻 합니다. 무서운 코끼리는 목숨을 앗아가는  살귀이고, 우물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네 마리의 뱀은 인간의 몸인 사대(四大)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합니다. 나무넝쿨은 중생의 생명줄을 말하고,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의 시간을 말하며, 꿀은 중생들의 앞에 펼쳐진 오욕락(五欲樂)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잠시의 오욕락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常〕 즐거움의 착각〔樂〕, 존재의 착각〔我〕, 깨끗함의 착각〔淨〕이 더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고,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이렇듯 인생은 무상(無常)하고 제행(諸行)은 무상인 것이며 제법(諸法)은 무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설하셨던 것이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사성제인데 그 가운데 고성제는 인생은 고(苦)라는 것입니다. 생, 노, 병, 사의 근본 사고(四苦)를 이야기하고 여기에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득불고, 오온성고의 네 가지를 더해 인생이 팔고(八苦)임을 설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우리 인생에 대해 고(苦)라고 결론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인생에 행복이란 것이 없고 고만 있다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이해하면 저절로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고성제가 인생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라면, 집성제는 그것의 원인 분석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渴愛)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갈애의 근본 원인은 바로 무명, 즉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을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출처 : 금강신문(https://www.gg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