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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면

죽음의 역설(죽음의 비실제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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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 낯설게 보기:죽음의 통치성과 은폐된 욕구

Defamiliarizing Self-Determination on Death: Governance of Death and Concealed Desire

최혜지

 

 

죽음은 명확히 실재하는 현상이지만 나의 죽음은 나에게 부존재한다는 역설이다.

 

모든 생명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 정신적, 신체적 활동을 멈추고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무존재가 된다. 사망에 이르는 순간, 죽음을 인식해야 할 주체는 사라지고 무존재화되어, 죽음의 당사자에게 죽음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 된다(Nagel, 1979, 김분선, 2020에서 재인용).

 

생존해 있는 동안 개인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죽음은 불안의 궁극적 원천으로 개인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죽음이 현실이 되는 순간 물리적 현상으로써 죽음을 체감하고, 정신적으로 인지하는 주체는 현존성을 상실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나의 죽음이라는 실재적 현상은 살아있는 동안 의식 속에 상상으로 존재할 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비실재적 현상이 된다.

 

죽음의 주체와 객체, 경험의 주체와 객체가 교차적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또한 역설적이다. 사망에 이르는 주체는 나이지만 나의 죽음을 직접 경험하는 이는 타인이다. 반면 타인의 죽음에서 사망의 당사자는 타인이지만 그의 죽음을 직접 경험하는 이는 내가 된다. 나의 죽음을 직접 경험하는 이는 타인이고, 타인의 삶에서만 나의 죽음은 의미를 가지며, 나는 타인의 죽음만을 직접 경험하고, 타인의 죽음만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영혼이 우주에서 사라지고 육체마저 공간감을 잃게 되는 나 자신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은 나의 죽음을 오감으로 지각하고 관찰함으로써 나의 죽음은 그의 인식의 일부가 된다.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의 역설이다.

 

 

사망에 이른 결과, 삶을 종결짓는 현상이지만 죽음은 결과이기보다 과정이며, 과정으로서 죽음은 곧 삶과 같다는 점에서 죽음은 또한 역설적이다.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나는 내 죽음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개인에게 자신의 죽음은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살아가는 과정과 동일한 궤적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곧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죽음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고, 사망에 이르는 과정 즉 죽음은 삶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사건이 지극히 집합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죽음은 역설이다. 죽음은 개인에게 일어난 현상이지만 동시에 남겨진 자의 삶을 재구성하는 공동체적인 사건이다. 망자의 생을 구성해 온 다양한 구조와 인연 속의 타인은 망자의 죽음을 공동의 사건으로 공유하고 영향을 받는다. 상실감, 슬픔, 죄책감의 심리적 고통으로부터 빚이나 유산이 낳은 경제적 충격에 이르기까지 죽음이라는 사적인 사건이 야기하는 파장은 집합적이다. 나의 죽음으로 내가 이루고 있던 관계는 불안정해지고, 남겨진 공동체는 불안정한 구조를 조정하고 재구성하는 집합적 과제를 갖는다. 더불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가는 사적인 사건임에도 공동체의 규범과 질서에 의존한다. 전통적 가치가 강한 사회일수록 죽음의 과정에 집합적 개입이 허용되고, 장례와 애도의 형식은 공동체의 규범을 따른다. 반면 개인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일수록 죽음은 나와 가족의 경계 안에서 다루어지고, 사후 절차는 병원이나 시설의 질서 안에 갇히게 된다. 죽음이 얼마나 존엄 혹은 비참하게 다루어지는가는 결국 공동체의 규범과 품격에 의해 결정되고,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집합적 태도는 공동체를 향한 불신이나 신뢰로 발전된다.

 

 

나의 죽음은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비실재적 현상이지만 나의 죽음을 경험한 타인의 존재 일부를 구성하며, 타인의 죽음은 나의 존재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죽음은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적인 현상이지만 공동체의 구조, 규범을 재구성하는 집합적 사건이며, 동시에 나의 죽음은 공동체의 질서와 규범에 종속된다. 또한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음은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고, 죽음의 과정은 곧 삶의 과정과 동일하다는 죽음의 역설은 존엄한 삶을 존엄한 죽음과 등치시킨다. 이와 같은 죽음의 역설로부터 죽음 또한 존엄을 요구하는 주체와 존엄을 책임져야 할 주체가 지명되는 죽음의 권리성이 도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