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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기

법륜스님, 붓다의 수행과 깨달음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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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회와 해탈에 대한 강연내용입니다. 불교방송 유튜브를 참고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6_19ep0dOs)

 

 

법륜스님 강연(윤회와 해탈)

 

 

강연에 앞서 법륜스님은 종교적 측면에서 윤회와 해탈, 진리 탐구측면에서 윤회와 해탈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1.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움을 느낀다.

밝을 때 보다 어두울 때 두렵다. 어둠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고,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고 느끼는 것이다. 

 

 

2. 죽음에 대한 인류의 태도는 2가지다.

첫째는 영생하는 것이다. 죽음을 회피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했다.

두 번째는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생각이다. 현생보다 더 좋은 곳에 간다고 생각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당, 극락, 지옥이 생겨난 것이다. 

 

인도사람들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니, 사망 직후 화장을 한다. 헌 집을 떠나 새 집을 갖는다는 생각과 비슷하다. 인도 드라비다족, 아리안족이 윤회사상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윤회는 부처님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윤회는 인도의 전통이다.

 

 

3. 부처님은 윤회(죽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했다.

두려움에 대한 근원적인 것을 탐구했는데, 그것은 무지 때문이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무명은 타파되었다."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노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다 보니까,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것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의 차이점이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진리)은 무명을 타파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이고,

종교로서 불교는 윤회에 의해 좋은 삶을 받는 것이다. 

진리탐구와 종교로서의 믿음은 이러한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모순되는 관계가 있다. 

 

윤회를 하고 안하고는 주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해가 뜨고 해지 지는 것을 본다. 해가 뜨는 것은 시작이고 진다는 것은 끝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런데 돈다라고 생각하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후에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각적으로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이라고 느끼지만, 진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태양은 뜨는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진실은 무시무종이다. 

 

사람들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류는 어떻게 시작되었지?' 이런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온다.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종말론이 나온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창조론도 없고 종말론도 없을 것이다.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두려움이 없어져버리면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 진실을 깨닫는 방법이다. 

 

 

4. 본질을 알면, 더 이상 물음이 없다. 

깨달음을 얻어서 두려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두려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상 용어로 해가 뜬다, 해가 진다라는 말은 여전히 사용한다. 

 

 

5. 자아가 있어야 그것이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갈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자아라는 것이 없다고 본다. "무아"라고 한다. 

우리의 믿음과 철학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믿음은 전통과 문화이다. 진리와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논의할 것이 없다. 

 

믿음은 개인마다 다르다. 누구도 개인의 믿음에 간섭할 수 없다.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이 다르다고 접근해야 한다. 

 

믿음의 문제를 진리탐구 측면에서 검증을 하려고 한다. 결론이 날 수 없다. 

믿음은 개인 자유의 영역이다. (헌법에서도 보장한다)

 

 

6. 붓다의 윤회는 그 의미가 다르다. (인도에서 말하는 윤회, 즉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

붓다는 사람들이 왜 괴로운가? 하는 것을 생각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은 없다. 

 

붓다는 괴로움의 뿌리가 욕망이고, 그 욕망을 충족하면 사람들은 기뻐한다. 그런데 욕망을 충족하더라도 또 다시 욕망이 커진다. 붓다가 출가하기 전 욕망을 충족하는 쪽으로 경험했다. 욕망은 충족되자마자 더 커진다. 그래서 욕망을 따라가면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달았다.  

다시, 욕망으로는 해탈할 수 없어 고행으로 욕망을 끝없이 억제했다. 고행도 결국 해탈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라

 

담배를 피워야지(욕망), 안 피워야지(고행)

이 두가지를 모두 버리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알아차림을 통해 가능하다. 

이것이 중도이다. 단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담배를 피우는 것도 아니고 억제하는 것도 아니다. 

담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담배를 피워도 잠시 좋지만 불행이 오고, 담배를 억지로 참아도 그 스트레스로 불행이 온다. 이렇게 행복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

고통과 쾌락이 되풀이 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고락을 분리해서 고는 버리고 락만 얻겠다는 생각은 이루어질 수 없다. 

쾌락의 본질은 곧 고통이다. 

아름다운 여성의 몸도 결국 그 안에 똥이 들어있다는 것을 본다. 

 

 

7. 이 윤회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이 해탈이다.  

욕망에 끌려가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것이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중도다. 고통이 사라지면 쾌락도 동시에 사라진다. 

 

참자유인데, 그렇게 말하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해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고가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하면 열반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 자유로움이다. 해탈과 열반이다.

 

죽어서 극락가는 것은 종교적 이상이고

수행자의 이상은 해탈과 열반이다. 

 

죽어서 극락가느냐 안 가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원망 안하는데, 부모와 남편을 원망한다. 

욕구, 내 원하는 것을 안해주면 원망한다.

길 가는 사람들은 왜 원망 안하느냐, 내가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

1. 종교적 윤회는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2. 진리적 윤회는 행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것을 말한다.

 3. 행과 불행의 되풀이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4. 해탈과 열반은 누구나 다 가능하다. 

5. 종교를 넘어서 (진실)한 차원 높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