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알아차리기

[예수 vs 부처], 웃음 없는 예수와 울음 없는 붓다

반응형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성인들께서는 

과연 호탕하게 웃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아니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는 기록이라도 있는가?

 

왼쪽 예수님의 웃음(평화 강명옥의 블로그에서) 오른쪽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열린 동자승(중앙일보)

 

 

인간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웃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 웃지 않았으며 울지 않았겠는가?

 

아마도 실제로 웃거나 울었는데 이러한 것이 종교적 내용과 맞지 않아 기록하지 않았거나 뺏을 가능성이 있다. 

 

순수하게 경전에 기록된 내용만을 가지고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낸 장면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 부처
웃었다는 기록 직접 '웃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기뻐했다는 기록은 더러 있음.(누가복음 10:21, 요한복음 11:15) 부처님이 한 왕에게 진리를 설명하면서 웃는 장면이 있다(우파리 경전) 미소짓는 장면은 상당히 많다. 

“그때 세존은 곧 그 자리에 앉아 고요히 웃으시고 다시 잠자코 혼자 생각하셨다.” “그때 아난다는 세존께서 빙그레 웃으시는 것을 보고, 곧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때 세존은 모든 용녀들이 깊이 믿게 되었음을 아시고 빙그레 웃으셨다.”

출처 : 불교언론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울었다는 기록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장 35절,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누가복음 19장 41절, 예루살렘 성의 멸망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히브리서 5장 7절
부처님이 직접 울었다는 기록은 없다.
분노의 표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성전정화사건(요한복음 2장 13절~16절)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마태복음 23장) "화 있을진저"
부처님의 사촌이자 제자인 뎃바닷타가 부처님 생명을 위협하고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렸을 때, 강하게 질책함.

제자들이 수행에 나태하거나 규율을 지키지 않았을 때 질책과 책망을 함.
왜 웃지 않았는가?  예수님과 부처님이 웃는 장면이 거의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사역과 가르침이 주로 인간의 고통, 구원, 해탈, 삶의 깊은 의미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1. 종교적 메시지의 심각성
   - 예수님의 사역은 인류의 죄,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메시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메시아로서 자신을 내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가르침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들은 그를 경건하고 심각한 인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의 고통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행(팔정도), 그리고 해탈(열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삶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중생들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 깊이 사색하고, 수행하며, 자비를 실천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본질은 인간의 고통과 그 해탈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웃음보다는 평정심과 자비의 감정이 강조되었습니다.

2. 당시 문학과 종교적 경향
   당시 종교적 인물들은 경건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웃음이나 유머는 성스러운 경전이나 기록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신성한 인물로 여겨지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가벼운 감정이나 행동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권위와 무게감을 줄일 수 있다고 여겨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3. 웃음과 영적 상태
   웃음은 일반적으로 일상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종교적 맥락에서는 이를 영적 또는 신성한 경험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로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은 자신들의 가르침에서 궁극적인 평화와 깨달음을 중시했으며, 웃음보다는 내면의 평정과 깊은 자비, 영적 성숙을 강조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부처님이 웃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의 기록이 주로 진지하고 심오한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웃음이 그들의 이야기에서 덜 부각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의 삶은 영적 성장과 고통의 해소를 중점적으로 다루었기에, 웃음은 그들의 이야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는 웃지 않았을까?

어떤 사람은 예수가 유쾌하게 웃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가나의 혼인잔치'를 예로 든다. 그러나, 명확하게 웃었다는 기록은 없다. 

 

예수의 웃음

 

또 다른 어떤 이는 당시의 종교적 근엄함 때문이고 솔로몬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짓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가 한번도 웃지 않은 것은 솔로몬의 이 담론들 때문일 것이다.
[출처] 예수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웃음을 저주한 것인가?|작성자 하늘나그네

 

 

어떤 사람은 불경과 성경에 웃음이 많지만,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캐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경이나 성경을 열심히 읽은 신자도 경전에서 조크·유머를 읽고 웃었던 기억은 잘 나지 않을 것이다. 학자들은 경전을 대하는 우리의 ‘심각한’ 태도가 유머를 놓치게 한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또 시대의 문제와 언어, 특히 번역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성현들의 시대와 오늘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간격이 있다. 몇 년 만에도 바뀌는 게 ‘웃음 코드’다. 전문가가 아닌 현대인이 성현 시대의 웃음 코드나 사회적 맥락을 알기 힘들다. 우리가 읽는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문자화된 아람어 구어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영어 성경이건 중국어 성경이건 메시지는 같다. 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유머는 번역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원전의 언어 자체가 유머 친화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부처님의 말을 최초로 기록한 팔리어는 표현이 엄숙한 언어다.

티베트 불교 신자들도 잘 웃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를 묻자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은 웃을 때 새로운 생각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쉬워진다.” 티베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만약 두 명의 철학자가 의견이 일치한다면, 둘 중 하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만약 두 명의 성자가 의견이 불일치한다면, 둘 중 하나는 성자가 아니다.” 티베트 불교를 비롯해 불교는 얼굴보다는 ‘머리’로 웃게 한다.

부처님은 많은 유머를 썼다. ‘십사무기(十四無記: 붓다가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 열네 가지 무의미한 질문)’와 가장 밀접한 <전유경(箭喻經)>에 좋은 사례가 나온다. 독 화살을 맞은 사람의 예이다. 독 화살을 맞은 사람이 당장 독 화살을 뽑지 않고,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화살인지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유머는 웃음보다는 미소(微笑)를 유발한다.


예수님은 웃음을 자아내는 반어법·과장법을 사용하면서 기득권층을 비판했다.(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 자체가 과장법을 많이 쓴다) 다음과 같은 경우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마태복음 19:24) 어느 시대나 부자는 그리 인기가 없다. 이 말을 들은 청중은 속이 다 시원했을지 모른다.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마태복음 5:40)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겉옷·속옷을 다 주고 나면 알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기쁠 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출처 : 월간중앙(https://www.m-joongang.com)

과격 이슬람주의와 이슬람을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이슬람 자체는 평화와 웃음의 종교라는 것을 망각하기 쉽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이빨이 보이도록 웃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보통은 빙그레 웃는 정도였던 것 같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언젠가 어떤 할머니가 무함마드를 찾아와 낙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늙은 여자는 낙원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여자가 울면서 돌아가려고 하자 무함마드는 이렇게 덧붙였다. “늙은 여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젊은 여자가 됩니다.”

출처 : 월간중앙(https://www.m-joongang.com)

 

 

결론적으로 

성격속의 예수는 눈물이 있었지만, 웃음은 없었다. 

불경속 붓다는 웃음이 있었지만, 울음은 없었다. 

 

경건하고 심각한 것 속에는 폭력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반면에 웃음속에 칼을 감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웃으며 만나는 종교가 있었으면 좋겠다.